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국 본토 항공전 (문단 편집) == 일화 == * 현대에도 인터넷 밈/짤방으로 유명한 [[Keep calm and carry on]] 포스터가 바로 이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국민 여러분. 동요하지 마시고, 평상시처럼 행동하십시오."'''라는 뜻이다. * 독일의 동맹이던 [[이탈리아 왕국]] 역시 본 전투에 참여하였다. 7월 10일 파병부대를 결성하여 10월 19일에 배치를 완료하였는데, 별다른 활약도 못했고 독일군 지휘부도 이탈리아 공군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허리케인보다 못한 수준의 [[G.50]]과 [[복엽기]] [[CR. 42]], 구식 폭격기인 BR.20을 가져왔으니 CR. 42는 복엽기 수준으로서는 우수한 속도와 상승력을 가지고 복엽기 최후의 역사를 기록했지만 결국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2선으로 물러났다. * 사실 독일 공군은 [[Bf109]]보다 앞선 세대의 복엽기 시절부터 외부연료탱크를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Bf109E가 워낙 [[먼치킨(클리셰)|먼치킨]]스러운 포스를 보여주고, 유럽 작전을 하는 동안 항속거리가 문제가 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외부연료탱크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Bf110이면 충분히 호위를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개량에 들어갔지만 배치가 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영국 본토 항공전이 끝났다. * 독일군은 쌍발전투기 [[Bf110]]이 충분히 영국공군을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사실 Bf110이 이런 추태를 보인 건 폭격기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호위하기 위하여 기존에 사용하던 공세적 호위 대신 근접 호위를 시켰기 때문이다. 거리가 짧으면 근접 호위가 필요없지만 영국을 공격하기에는 근접 호위가 필요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호위 방식은 110의 장점을 살리기 힘든 조치였던 것이다.] 결국 이 전투를 계기로 제트기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몇년동안 쌍발 제공전투기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 다만 아주 멸종한 건 아니어서 이후 개발된 쌍발 전투기들인 [[드 해빌랜드 모스키토]], [[Ta 154]], [[Me 410]], [[DH-103 호넷]] 등은 전폭기나 다목적 전투기, 지상공격기, 야간전투기 등으로 쓰였다.] 그리고 영국 공군도 [[브리스톨 보파이터]]라는 뛰어난 쌍발 전투기를 공대공 임무에 투입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훗날 미군이 [[P-38 라이트닝]]을 투입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부 유럽 전선에서 마주쳤던 독일군 기체는 Bf109와 [[Fw190]]이었는데 이들에 대해 속도/고도 우위를 점하지 못 해 선회전을 벌일 수 밖에 없었고,[*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P-38이 독일 전투기를 상대하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일반적인 속도나 고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평비행 기준으로의 속도는 전혀 뒤쳐지지 않았고, 상승력은 도리어 더 좋았다. 독일 조종사들도 '자기들처럼 급강하로 속도를 붙이지 않아도, 수평비행을 하다가도 급상승 할 수 있는' P-38의 상승력만큼은 인정했다. 라이트닝이 겪은 실제 문제는 하나는 라이트닝 초기형들은 '압축성 문제'로 인해 시속 833km 이상에서 수평미익이 기능을 잃는 문제 때문에 (900km/h 이상으로 가속할 수 있던 독일 전투기들에 비해) 급강하 가속에서 뒤쳐진다는 것과, 보통 더 멀리서 눈에 띄는 탓에 특히 아군 조기경계망에 지원받으며 활동하는 독일 조종사들은 미리 고도의 우세를 점하고 공격해 들어갈 기회를 잡기 쉬웠다는 문제였다. 조종사들 자체의 전술적 기량에서도 독일 측이 미군보다 아직 우세한 시점이었으니 이 정도의 불리함이면 전과가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점이 개선되었을 즈음에는 P-47, P-51이 등장해 있었고 말이다. 그래도 태평양 전선에서는 충분히 깡패짓을 하고 날아다녔고, 지중해에서의 해상, 공중보급 차단에서는 매우 잘 써먹었기 때문에, Bf110 수준으로 실패작이 되지는 않았다.] 항속거리도 [[P-51]]에 뒤쳐졌기에 결국 지상 공격용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Bf110의 경우도 야간 전투기, 정찰기, 동부 전선에선 지상공격기로 전용되기도 했다. * 런던 대공습 당시 폭격기 근접 호위를 명령하자 많은 전투기 조종사들이 반발하였다. 이에 괴링은 화를 내면서 전투기 조종사들을 무능한 겁쟁이로 매도하였고 조종사들에게 "자,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봐! 내가 뭐든지 지원해 주겠네!" 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아돌프 갈란트]]는 '''"스핏파이어를 주십시오!"''' 라고 대답했다. 즉, 영국의 스핏파이어처럼 [[호위기|폭격기 호위]]가 아닌 [[공중우세기|적 전투기와의 전투를 전담할 전대]]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본래라면 110이 호위를 전담하고 109가 전투기와 전투를 전담하는 계획이었으나 작전 환경의 변화로 이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 도버 해협 상공에서도 전투가 자주 벌어졌고 격추당하여 조종사들이 탈출한 경우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영국과 독일 모두 구조작전에 나섰다. 영국해안 근처에는 민간인 자원자들도 활동하였고 처음에는 영국군, 독일군 할 것 없이 모두 구조해 주었는데, 런던 폭격이 시작되고 계속되는 피해에 화가 난 민간인 자원자들은 만약 물에 빠진 사람이 [[독일어]]를 하면 그냥 익사하게 내버려 두기도 했다. * 런던 폭격이 한참 달아올랐던 시기에 낙하산을 타고 탈출한 조종사가 영국 조종사인 경우 시민들이 차와 먹거리를 제공하고 따뜻한 격려와 함께 비행장까지 태워다주기까지 하였다. 반면 내려온 사람이 독일 조종사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오죽하면 [[경찰]]과 [[군사경찰|헌병]]들이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에게 걸리면 맞아 죽을지 모르니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 는 방송을 하고 다녔을 정도였다. 반대로 연합군이 독일 점령지를 공습할 때에는 격추된 승무원들이 독일군이나 민간인들한테 살해당하는 사례들이 있었다.[* 인도적인 면도 있지만 장교, 그것도 조종사 정도 되는 엘리트 군인이라면 포로로 잡는 게 훨씬 이득이다.] 독일의 에이스 [[귄터 랄]]도 그가 미국식 항공 재킷을 입은 것을 보고 미국인으로 오해한 농부들한테 죽을 뻔했다가 그가 랄임을 알아본 농부 덕분에 살아남은 사례도 있다. 랄의 회고에 따르면 다짜고짜 쇠스랑을 들이밀었다고. * 영국 수뇌부가 사실 [[울트라]]를 통해서 코벤트리 공습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독일에서 자신들의 암호가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될까봐 그냥 내버려뒀다는 [[음모론]]이 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음모론이 [[이미테이션 게임(영화)]]에서 나온다. * 당시 [[폴란드]] 조종사들은 영국에 [[폴란드 서부군]] 소속으로 망명해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독일군 조종사로 오해받는 일이 왕왕 있었다고 한다. 탈출한 폴란드 조종사들이 "안뇽하세요?" 하고 어설픈 영어로 인사하면 "안녕하지 못하다 이 '''독일놈'''아!" 하는 반응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영어]] 사용을 교육받았지만, 급박한 공중전이 되면 흥분한 나머지 본능적으로 [[폴란드어]]를 사용했기에 영국 공군 교관 조종사들은 "이놈들아, 제발 진정해! '''그리고 영어로 말하란 말이야, 영어로!''' 폴란드 말로 떠들지 마!" 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가장 높은 전과를 올린 편대는 폴란드 조종사들로 이루어진 제303전대이다. 한 영국 참전용사는 이를 두고 "폴란드인들은 정말 독일인들을 미워했어요. 그래서 전투에 나서면 정말 죽도록 싸웠죠. 우리도 열심히 싸웠지만 그 사람들만큼은 아니었어요."라고 증언했으며 영화 《[[공군 대전략]]》의 한 장면: [[http://youtu.be/yXf1bhEEXd0|#]]. Repeat Please!!로 불리는 매우 유명한 장면이다. 기지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독일군과 교전을 강행하는데, 아무리 봐도 정말 영어를 알아먹지 못했다기 보다는 알아먹긴 했는데 '''모르는 척 무시하고 달려드는''' 모양새다. 실제로 폴란드 조종사들은 전투 의지가 너무 높아서 마구 달려드는 통에 영국 공군 지휘관들이 뒷목을 잡을 일도 많았다. 공군대전략의 이 장면에서 독일군을 맨 처음 발견한 폴란드 조종사 옥스는 런던 상공에서 격추당해서 탈출했고, 결국 [[https://youtu.be/JEcL6SvjuPE|농부들한테 잡혀가는 식으로 구조된다.]] 마지막에는 영어 교재를 보면서 영어 공부 중이다. * [[미국]] 육군 항공대에서도 8명의 조종사들을 파견해서 참전했다. 이들은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지급받고 영국 왕립공군 제337전투비행대로 편성되었으며, 그 중 1명이 전사했다. [[진주만(영화)|영화 진주만]]에서 주인공의 친구가 영불해협 전투에서 실종되었다 돌아오는 부분은 이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 자원참가한 [[미국]] 조종사들과 다른 지원 인원은 영국군에 의해 독수리비행대대라고 명명되었다. 자세한건 [[Eagle Squadron]] 문서 참조. * 런던 전체가 불바다가 되다시피 했지만, 런던의 명물 중 하나인 [[세인트 폴 대성당]]은 대폭격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살아남았다. 독일군 조종사들이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일부러 남겨두었다는 설이 있다. 이를 소재로 다룬 SF로 [[코니 윌리스]]의 화재 감시원이라는 소설이 있다. * 위와는 반대의 상황으로, 워낙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지다 보니 왕궁인 '''[[버킹엄 궁전]]의 정원에 폭탄이 떨어진''' 일도 있었다. [[https://www.independent.co.uk/life-style/royal-family/buckingham-palace-bombing-ww2-george-vi-queen-mother-elizabeth-b421060.html|단순 오폭이 아니라 대미지를 제법 받았다.]] 그 광경을 보고 심란해 하던 [[조지 6세]]에게 아내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비는 "이제 폭격에 희생된 국민들에게 떳떳하게 나설 수 있게 됐어요."[* 혹은 "이제야 피해를 입은 국민들의 집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혹은 더 대담하게 '폭격 때문에 담벼락이 무너지니 국민들의 부서진 집들이 더 잘 보이네요.'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라며 위로했다. 사실 왕궁이 폭격을 맞은 것을 두고 영국 당국은 처음엔 국민들의 사기 저하를 우려해서 언론에 대한 보도 통제를 시도했었다. 하지만 처칠이 "오히려 이걸 알려야 국민들이 단합할 수 있다." 며 보도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해서 알려지게 된 것. 그리고 결과는 처칠이 바라던 그대로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반될 뻔한 민심이 다시 결집했는데, 이전까지는 런던이 공습당해도 나치의 제1타겟이 군수공장이다 보니 공업 지대 위주로 집중 공습당했기 때문에 공업지대와 가까운 노동자들의 주거 지역이 폭격 피해를 심하게 입었고, 이런 폭격 피해에 대해 노동자층에서는 영국군이 부자와 귀족만 보호하니 우리만 피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이 있었으며 실제로 상류 인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고급 호텔을 소규모 시위대들이 습격한 사례도 존재했다. 이런 호텔들은 고객들이 폭격을 피할 수 있도록 자체 피난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군중들이 자신들도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며 시위를 벌인 것. 이 때 호텔 지배인이 진압을 요구하자 경찰 측에서는 "호텔에 손님이 왔으면 마땅히 대접을 해야죠. 호텔의 집기 등을 파손하지 않는 이상 우린 간섭 안 합니다." 라고 말했다. 결국 호텔 측에서 시위대들에게 차를 대접했고, 분위기가 수그러든 군중은 자발적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날 폭격으로 버킹엄 왕궁까지 피해를 입어 '''왕실도 똑같이 집이 날아간 상태'''가 되었으므로 국민들의 피해의식이 희석되었다. 당시 시위를 주도한 사람 중 한 명도 "이제는 왕이나 귀족이나 자기 집이 날아간 건 똑같다. 우리만 집을 잃은 게 아니다. 저들도 우리와 똑같아졌다." 라며 시위를 거두었다. 이후 버킹엄 궁전은 다음해인 41년 한번 더 폭격 피해를 받았으며, 영국 국민들은 단결하여 버텼다. 한편 당시 윈저 성에 머무르며 공주들을 담당하던 시녀의 기록에 의하면 릴리벳 공주(훗날 엘리자베스 2세로 즉위)와 마거릿 공주와 관련해 두 공주와 같이 외출을 하다 초병에게 검문을 받은 일화, 윈저 성 거주자 전원이 가스 마스크 훈련을 받아야 했던 일화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당시 공습이 심해서 비행기 소리만 들어도 RAF인지 루프트바페인지 혹은 V1인지 구별할 수 있았다는 일화도 있다. * [[대한민국]] 웹상에서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 독일의 실패로 귀결된 원인 중 하나로 '''대륙내 공격 위주로 편성되었던 독일 공군에게 대륙간 공격이라는 임무를, 그것도 영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말이 반 년이지, 실질적으로는 한 달만 주고 계획을 짜서 실행해야 할 정도'''로 황당한 일정으로 들고 있다. * 영국 본토 항공전엔 세계 각국의 파일럿들이 참전하였는데 영국과 우호적인 국가 및 영국의 식민지, 그리고 독일에게 점령당한 국가의 파일럿들이 자발적으로 참전하였다. 영화 다크 블루 월드는 조국을 되찾기 위해 분전한 체코슬로바키아 조종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다음은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참전한 각국의 순수 파일럿들의 숫자이다. 영국-2,334명, 폴란드-145명, [[뉴질랜드]]-126명, [[캐나다]]-98명, [[체코슬로바키아]]-88명, [[호주]]-33명, [[벨기에]]-29명, [[남아공]]-25명, [[프랑스]]-13명, [[아일랜드]]-10명, 미국-11명, [[로디지아]]-3명, [[뉴펀들랜드]]-1명, [[자메이카]]-1명, 그리고 한 명은 이름이 중동계라 [[팔레스타인]] 지방 출신의 영국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구글을 검색해 보면 터번을 쓰고 있는 조종사들이나 유색인종 조종사들이 스핏파이어나 호커 허리케인 조종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도 볼 수 있다(!). 출처는 영국 공군 박물관 홈페이지. 현재는 개편되어 페이지가 사라졌으나 위키피디아에 가보면 남아 있다. * 체코슬로바키아 파일럿들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조국으로 돌아갔다가 강제 노동수용소에 끌려갔다는 말이 있으나 실제로 RAF의 체코슬로바키아인 편대(310, 311, 312, 313 편대)는 모두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공군에 합류하였다. 반면 [[자유 폴란드군|RAF 소속의 폴란드인 조종사들]]은 당시 [[폴란드 망명 정부]]가 반소였기 때문에 돌아가면 진짜로 수용소행이 분명했고, 결국 대부분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폴란드 조종사들은 이 당시의 공을 인정받아서 자유 폴란드군 장병 중 유일하게[* 나머지 [[자유 폴란드군]]은 영국 등 서방에게 [[토사구팽]] 당해서 제대로 공을 인정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전승 행사조차 참석할 수 없었다.] 전승 기념행사에 참석이 가능했다. 하지만 조종사들은 다른 폴란드군 전우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불참했다. * 당시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은 나치를 피해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215,000파운드를 기부해서 스핏파이어 43대를 구입하였다. 그리고 라디오 오라녜(Radio Oranje)[* 오렌지색은 네덜란드의 상징색이다.]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히틀러는 개XX라고 비방하고 지속적으로 나치에 대한 저항을 촉구하였다. 처칠은 여왕에 대해 '런던에 있는 망명정부 인간들 중에 유일하게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고 한다. * 영국 파일럿들의 활약을 두고 [[윈스턴 처칠]]은 다음과 같은 칭송을 남겼다. >인류의 분쟁의 영역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br]Never in the field of human conflict have so many owed so much to so few. 한편 처칠의 칭송을 들은 [[영국 공군]]의 [[혹자]]는 '저 양반이 드디어 우리 월급을 올려주려나 보군.' 이라고 뇌까렸다고도 한다. * 이때 영국에서 활약한 전투기 조종사들을 추모하는 곡으로 [[아이언 메이든]]의 [[Aces High]]라는 곡과 [[Sabaton]]의 Aces in exile이라는 곡이 있다. 후자는 좀 더 자세하게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캐나다 파일럿들을 가사에서 언급한다. *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영국 본토 항공전의 주역이었던 스핏파이어, 허리케인 비행대를 기리기 위해 바쳐진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각 비행대의 문장과 이름을 리본으로 그려놓은 것이 장관. [[https://www.westminster-abbey.org/about-the-abbey/history/raf-chapel|이렇게 생겼다.]] * 미국 CBS 방송의 유럽 특파원이었던 [[에드워드 머로]]는 런던 대공습을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중계해 미국 내부의 여론이 돌아서는 데 기여했다. * 독일군 전투기들의 무전기 주파수가 영국군 전투기들의 주파수하고 비슷하다 보니 폭격기하고 연락한다고 주파수 돌리다가 영국군 전투기와 연결되어서 양국 조종사들이 [[트래시 토크]]를 주고받은 사례도 상당히 자주 있었다고 한다. * 당시 영국 전역에서 운행하던 [[야간열차]]는 운행이 중지되거나 차량 내부는 소등과 함께 커튼을 치고, 외적으로는 기관차와 객차 할 것 없이 동체와 창문을 까맣게 칠하고 운행했다. 독일 항공기의 대지공습과 기총사격을 피하기 위한 [[등화관제]]였다. * 이 와중에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Women%27s_Voluntary_Service_%28United_Kingdom%29|여성 자원봉사단]](WVS)에 의해서 [[홍차]]와 과자가 모든 시민들에게 배급되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티타임은 지켜야 한다는 영국인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 당시 영국 정부는 도시 지역의 아이들을 시골로 피난시키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 캠페인이 시작된 것은 1939년 9월 1일로, 2차대전이 발발한 직후의 일이었다. 3일 동안 150만명의 어린이들이 시골로 피난했다. 영국 정부는 시골 농가들에게 어린이들을 맡아달라고 했고,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큰 건물을 징발하여 임시 보육원을 만들어 어린이들이 머물게 했다. 이들은 1940년 1월까지 약 절반 정도가 도시로 돌아왔는데, 추축국이 그동안 영국을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자 다시 아이들의 피난이 시작되었고, 이들은 1945년 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올 수 있었다. [[https://www.iwm.org.uk/history/the-evacuated-children-of-the-second-world-war|관련 링크]] [[나니아 연대기]] 중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서 페번시 가의 네 남매들이 시골에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